스태튼아일랜드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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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태튼아일랜드 철도(SIR)는 뉴욕 시의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운행되는 통근 철도 노선이다. 1851년에 설립되어, 스태튼아일랜드의 세인트 조지 터미널에서 토텐빌까지 24시간 운행하며, 급행 열차와 완행 열차를 포함한 다양한 운행 패턴을 제공한다. SIR은 1970년대부터 뉴욕시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R44 및 R211S형 전동차를 사용하고, 2007년에 신호 시스템을 개선했다. 또한, 세인트 조지 및 톰킨스빌 역에서 OMNY를 이용한 요금 지불이 가능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화물 서비스도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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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튼아일랜드 철도 - [철도 노선]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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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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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행 지역 | 스태튼 아일랜드, 뉴욕시 |
기점 | 토텐빌 (남쪽) |
종점 | 세인트 조지 (북쪽) |
역 수 | 21 |
노선 수 | 1 |
소유주 | 스태튼 아일랜드 래피드 트랜짓 운영 당국 (SIRTOA), 메트로폴리탄 교통 당국의 자회사 |
운영자 | 뉴욕시 교통국 지하철 부서 |
웹사이트 |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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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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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스태튼아일랜드 철도(SIR)의 첫 노선은 1860년에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페리 환승역인 톰킨스빌에서 섬 남부의 종착역인 토텐빌까지였다. 당시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B&O)는 뉴욕 시내에서 여객과 화물 노선을 개발하려 했다. 그들은 뉴저지와 연결되지 않은 이 작은 철도, SIR을 인수했다. B&O의 지원으로 톰킨스빌에서 북쪽으로 노선이 연장되어 섬 북동쪽 모퉁이의 세인트 조지에 새로운 역이 건설되었다. 이 역에는 맨해튼과 연결되는 페리 터미널, 차량 기지, 차량 이동용 부두가 설치되었다.
1924년 8월에는 섬 내 3개의 여객 노선에서 전철화 공사가 시작되었다.
2. 1. 19세기
스태튼아일랜드 철도는 1851년 8월 2일 퍼스앰보이와 스태튼아일랜드 주민들이 토텐빌에서 스테이플턴까지의 철도 노선을 청원한 후 설립되었다. 이 철도는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의 대출로 자금을 조달받았는데, 그는 동부 해안에서 스태튼아일랜드와 맨해튼을 잇는 유일한 페리 운영자였으며, 이는 그의 첫 철도 사업 참여였다.[5] 이 노선은 1860년 6월 2일에 토텐빌까지 완공되었다.[6][7] 밴더빌트의 형제인 제이콥 H. 밴더빌트의 지휘 아래, 스태튼아일랜드 철도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페리들을 인수했다.[8] 1871년 7월 30일 화이트홀 스트리트 터미널에서 페리 ''웨스트필드''의 폭발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스태튼아일랜드 철도와 페리 노선은 적당한 수익을 냈다.[6][9] 1872년 7월까지, 철도와 페리는 수탁 관리 상태에 놓였다. 1872년 9월 17일, 이 회사는 조지 로에게 담보권 실행으로 매각되었다.[5][7][10] 그 다음 해 4월 1일, 스태튼아일랜드 철도는 스태튼아일랜드 철도 회사로 이전되었다.[11]
1880년까지 이 철도는 거의 운영되지 않았고, 뉴욕 주는 그 해 5월에 (검찰총장 해밀턴 워드를 통해) 회사를 해산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7][12] 섬에서 가장 저명한 주민 중 한 명인 에라스투스 와이먼은 1880년 3월 25일에 스태튼아일랜드 래피드 트랜짓 컴퍼니(SIRT)를 조직하고,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B&O)와 제휴하여 섬에 대규모 철도 터미널을 건설하고 6~8개의 페리 부두를 통합했다.[6][7][9] 그는 조지 로에게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인트 조지"로 명명하겠다고 제안하여 토지 구매 옵션 연장을 확보했다.[13][14]
밴더빌트 랜딩에서 톰킨스빌까지의 노스 쇼어 지선 구간 건설은 1884년 3월 17일에 시작되었으며,[7][9][15] 그 노선은 그 해 8월 1일에 여객 운송을 시작했다.[16] 톰킨스빌 바로 위에 있는 등대가 세인트 조지로의 노선 연장을 방해했지만, SIRT가 의회 법안을 로비한 후, 등대 아래에 약 176.78m 길이의 복선 터널 건설이 약 190000USD에 1885년에 시작되었다.[17] SIR은 1885년에 B&O에 99년 동안 임대되었다.[6][7][9] 이 임대 수익금은 세인트 조지의 터미널 완공, 2마일의 해안가 부지 매입, 래피드 트랜짓 철도 완공, 킬 반 쿨 위의 엘리자베스포트에 다리 건설 및 기타 터미널 시설 건설에 사용되었다.[18] 노스 쇼어 지선은 1886년 2월 23일에 엘름 파크까지 개통되었다.[17] 세인트 조지 터미널은 1886년 3월 7일에 개통되었고, 모든 SIR 노선은 이 역까지 연장되었다.[7][9] 노스 쇼어 지선의 나머지 구간은 에라스티나 종착역까지 1886년 여름에 개통되었다.[6] 1888년 1월 1일, 사우스 비치 지선이 애로처까지 여객 운송을 시작했다.[19][20] 1893년, 사우스 비치 지선은 애로처에서 사우스 비치의 새로운 터미널까지 연장되었다.[21] B&O가 개통한 새로운 노선은 스태튼아일랜드 래피드 트랜짓 철도로 알려졌고, 원래 노선(클리프턴에서 토텐빌까지)은 스태튼아일랜드 철도로 불렸다.[22]
1886년, 와이먼의 3년간의 노력 끝에, 의회는 약 152.40m 길이의 아서 킬 위에 스윙 다리 건설을 승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9][23] 이 다리는 1888년 6월 13일 오후 3시에 3일 일찍 완공되었다.[5][10][24] 아서 킬 다리는 개통 당시 세계 최대의 도개교였으며, 건설 과정에서 사망자는 없었다.[23] 1889년, 볼티모어 & 뉴욕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아서 킬에서 저지 센트럴의 크랜포드까지 약 8.45km 길이의 노선이었고, 그 해 말에 완공되었다. 1890년 1월 1일, 첫 열차가 세인트 조지 터미널에서 크랜포드 정션까지 운행되었다.[6][25][26] 아서 킬 다리가 완공되었을 때, 미국 전쟁부는 리하이 밸리와 펜실베이니아 철도로부터 새로 건설된 다리를 다른 디자인의 다리로 교체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 다리가 아서 킬의 홀랜드 후크를 지나는 많은 석탄 바지선의 항해를 방해한다는 것이었다.[9] 1897년, 세인트 조지 터미널(철도와 맨해튼행 페리를 이용하는 곳)이 완공되었다.[7]
현재 SIR의 첫 번째 노선은 1860년에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페리 환승역인 톰킨스빌에서 현재 섬 남부의 종착역인 토텐빌까지였다. 당시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B&O)는 뉴욕 시내에서 여객과 화물 노선을 개발하려 했다. 그들은 뉴저지와 연결되지 않은 이 작은 철도, SIR을 인수했다. 강력한 지원을 받게 되면서 톰킨스빌에서 북쪽으로의 연장이 진행되었다. B&O는 복선화와 단단한 암반에서의 터널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노선은 한 정거장 연장되어 섬 북동쪽 모퉁이에 도달했다. 주변 지역은 섬 변호사의 명성에 유래한 세인트 조지로 개명되었고, 신설된 역에도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신역에는 맨해튼과 연결되는 거대한 페리 터미널, 차량 기지, 차량 이동용 부두가 설치되었다.
2. 2. 20세기
1900년 펜실베이니아 철도(PRR)가 B&O를 통제한 후 SIRT에 개선 사항이 적용되었고,[27] 그 후 B&O는 다시 수익을 냈다.[28] 1905년 10월 25일, 뉴욕시는 페리와 터미널의 소유권을 갖게 되었고, B&O를 화이트홀 스트리트 터미널에서 내쫓았다. 그 후 세인트 조지 터미널은 시에서 2318720USD를 들여 건설했다.[29]SIRT는 내로스 해협 아래 브루클린으로 가는 스태튼 아일랜드 터널과 뉴욕 시 지하철의 BMT 포스 애비뉴 선과의 연결을 예상하여, 제3 레일 전력 분배 시스템과 브루클린-맨해튼 교통 공사(BMT)와 유사한 차량으로 노선을 전철화했다.[30] 1925년 5월 30일 사우스 비치와 포트 와즈워스 사이의 사우스 비치 지선에서 첫 번째 전기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같은 해 11월까지 다른 지선도 전철화되었다.[30][31] 전철화는 교통량을 크게 증가시키지 않았고, 터널은 건설되지 않았다.[32] 1920년대에는 아우터브리지 크로싱 건설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스태튼 아일랜드의 웨스트 쇼어를 따라 지선이 건설되었다.[6] 이 지선은 다리가 건설된 후 교차로 남쪽 지점으로 잘렸다. 1928년 걸프 오일(Gulf Oil)은 아서 킬을 따라 부두와 탱크 농장을 열었고, 이를 위해 트래비스 지선은 1930년대 초 알링턴 야드에서 섬의 서쪽 해안 늪지대로 걸프포트까지 건설되었다.[6][33]
1937년 2월 25일, 미국 최대의 평면 교차로 제거 프로젝트인 포트 리치몬드-타워 힐 육교가 완공되었다. 이 육교는 1마일 이상 길이로 SIRT의 노스 쇼어 지선에서 8개의 평면 교차로를 가로질렀고, 섬의 북쪽과 남쪽 해안에서 34개의 교차로를 제거한 600만달러 규모의 평면 교차로 제거 프로젝트의 마지막 부분이었다.[34]
화물과 제2차 세계 대전 교통은 SIRT의 누적된 부채를 일부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1940년대에 이 노선은 잠시 수익을 냈다. 전쟁 중 모든 동해안 군 병원 열차가 SIRT에 의해 처리되었고, 일부 열차는 부상병을 대규모 군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스태튼 아일랜드의 알링턴 역에 정차했다. 전쟁 물자, 전쟁 포로 열차, 병력 수송의 필요성으로 인해 크랜퍼드 정션과 아서 킬 사이의 볼티모어 & 뉴욕 철도 구간은 매우 분주했다.[28] B&O는 또한 윈스턴 처칠과 같은 중요한 고위 관리들을 위한 특별 열차를 운행했다.[35] 1946년 6월 25일, 화재로 세인트 조지 터미널이 파괴되었고, 3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피해액은 총 2200만달러였다.[7][9] 이 화재로 페리 터미널, 맨해튼으로 가는 데 사용된 4개의 슬립 및 SIRT 터미널이 파괴되었다.[36][37] 정상적인 서비스는 1946년 7월 13일까지 복구되지 않았고, 임시 터미널 건설 입찰 요청이 그해 8월 21일에 발행되었다. 1948년 2월 10일, 윌리엄 오드와이어 시장이 교체 터미널을 약속했다. 새로운 2300만달러 터미널은 1951년 6월 8일에 페리, 버스 및 철도 서비스가 하나의 건물에서 제공되면서 개장했으며, 새로운 터미널의 일부는 이전에 단계적으로 서비스에 투입되었다.[7][38][39]
1947년 1,230만 명에서 1949년 440만 명으로 승객이 감소했는데, 이는 버스 요금 인하로 인해 철도 노선에서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전환했기 때문이다.[40] 1948년 9월, 주중 열차의 약 절반이 감축되었고, 오전 1시 29분 이후의 야간 열차는 취소되었으며, 회사 직원의 30%가 해고되었다.[41][42][43] 반발 후 서비스가 약간 증가했다.[44] 9월 22일, 주간 상업 위원회는 SIRT가 토텐빌과 뉴저지주 퍼스 엠보이 사이에서 88년 동안 운영해 온 페리를 폐지하도록 허용했고, 페리 운영은 10월 16일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의 선라이즈 페리로 이관되었다.[45][46] SIRT는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와의 경쟁으로 인해 1953년 3월 31일 자정에 노스 쇼어 지선과 사우스 비치 지선에서 여객 서비스를 중단했다. 사우스 비치 지선은 그 직후 폐지되었고, 노스 쇼어 지선은 화물을 계속 운송했다.[47][144] 1954년 9월 7일, SIRT는 그해 10월 7일에 토텐빌 지선에서 여객 서비스를 중단할 것을 신청했고,[48] 대규모 시 보조금으로 인해 지선에서 여객 서비스가 계속될 수 있었다.[5]
1956년, 아서 킬 스윙 브리지를 단선 수직 리프트 브리지로 교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1959년 8월에 개통되었다.[9][49] 조립식 2,000톤 다리가 제자리에 떠올랐다.[6] 새 다리는 아서 킬의 항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연방 정부가 프로젝트 비용 1100만달러의 90%를 부담했다. 1959년 8월 25일 다리가 개통되면서 화물 열차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27] 트래비스 지선은 1958년 트래비스(웨스트 쇼어)에 있는 새로운 컨솔리데이티드 에디슨 발전소로 연장되어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온 석탄 열차가 발전소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6]
1971년 7월 1일, 토텐빌 노선의 운영은 '''스태튼 아일랜드 래피드 트랜짓 운영국'''(대도시 교통국의 한 부서)으로 넘어가고, 이 노선은 뉴욕시에 의해 구매되었다.[50] 이 계약의 일환으로 이 노선의 화물은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에 따라 B&O가 계속 처리하게 되었다.[6] 1973년 2월 28일, 다른 자치구의 지하철 노선에서 사용된 최신 차량과 동일한 첫 번째 R44 차량 6량이 SIRT 서비스에 투입되어 1925년부터 운행되어 온 ME-1 차량을 대체했다.[51] 1971년과 1973년 사이에 6개 역에서 고상 승강장을 확장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52] 1985년에 역 재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노선의 R44는 1987년부터 개조되었다.[53]
B&O는 체사피크 & 오하이오 철도(C&O)와의 합병으로 더 큰 체시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고, 섬의 화물 운영은 1971년에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 공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9] B&O와 C&O는 1976년 4월 1일 파산한 미국의 북동부 노선의 합병으로 콘레일이 설립되면서 뉴저지와 스태튼 아일랜드의 다른 재산과 격리되었다. 이제 화물 서비스는 필라델피아에서 종료되었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B&O 기관차와 하루에 B&O 화물 열차 1대가 크랜퍼드 정션까지 운행했다.[9][54] 1973년, 뉴저지 중부 철도(Jersey Central)의 차량 부유(car float) 야드가 폐쇄되었다.[55] 그러나 B&O의 차량 부유 운영은 1976년 9월에 종료된 후 나중에 세인트 조지 야드에서 스태튼 아일랜드로 다시 가져왔다. 이 차량 부유 운영은 1979년 9월에 뉴욕 도크 철도에 인수되어 이듬해에 종료되었다.[9]
스태튼 아일랜드의 몇몇 고립된 산업만이 철도 서비스를 계속 사용했고, 세인트 조지의 야드는 본질적으로 버려졌다.[6] 1985년 4월, 화물 교통량 감소로 인해 체시 시스템은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를 뉴욕, 서스케하나 및 웨스턴 철도(NYS&W)에 매각했는데, NYS&W는 델라웨어 오츠고 공사(Delaware Otsego) (DO)의 자회사로, 10년 이상 지급해야 하는 약속 어음을 통해 150만달러에 매각되었다.[56] NYS&W는 이후 스태튼 아일랜드의 화물 운영을 유지했는데, 당시 10명의 고객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노선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를 희망했다.[56] 1989년, NYS&W는 엘름 공원 동쪽의 노스 쇼어 지선의 선로를 금수 조치하여 세인트 조지로의 모든 화물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 노선의 주요 고객인 프록터 & 갬블은 1990년에 폐쇄되어 화물 교통량이 더욱 감소했다. 1991년 7월 25일, 아서 킬 다리가 운행 중단되었고, 이 노선의 마지막 화물 열차는 1992년 4월 21일에 운행되었다.[57] 노스 쇼어 지선과 아서 킬 다리는 체시의 후계자인 CSX 교통(CSX)에 의해 인수되었다. 이 노선과 다리는 1994년에 뉴욕 시 경제 개발 공사(NYCEDC)에 다시 매각되었고, 그 후 10년 동안 잘못된 시작을 겪었다.[6]
SIRT는 1993년 7월 26일 뉴욕 시 교통국의 지상 교통 부서에서 래피드 트랜짓 부서로 이전되었고,[58] 그해에 동건 힐스 역이 접근 가능하게 되어 1990년 미국 장애인법을 준수하게 되었다.[59] 메트로카드는 1994년 3월 31일부터 세인트 조지 역에서 요금 지불에 사용되었고, 이 역은 메트로카드를 허용하는 50번째 MTA 래피드 트랜짓 역이 되었다.[60] 대도시 교통국(MTA)은 그해 4월 2일에 노선의 원래 이름을 MTA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SIR)로 복원했다.[6][61] 1997년 7월 4일, MTA는 그해의 "원 시, 원 요금" 요금 인하의 일환으로 톰킨스빌과 토텐빌 사이의 여행에 대한 요금을 폐지했다.[62] SIR 직원을 대표하는 운송 연합 조합 1440은 승객 증가가 예상되어 부분적으로 요금 인하에 대해 우려했다.[63] 다른 노선의 역에는 개찰구가 설치되지 않았고, 세인트 조지의 승객들은 출입 시 요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64] 요금은 이전에 차장이 차내에서 징수했다.[65] 요금 폐지는 노선을 따라 범죄가 즉시 급증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66] 1999년 4월 7일, 오후 급행 열차 3대가 시간표에 추가되어 이전 급행 서비스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급행 열차는 세인트 조지와 그레이트 킬스 사이의 역에 정차하지 않았다.[67] 2001년 6월 24일, 노스 쇼어 지선의 동쪽 부분의 수백 피트 구간이 스태튼 아일랜드 양키스 마이너 리그 야구팀의 홈구장인 리치몬드 카운티 뱅크 볼파크로 여객 서비스가 재개되었고, 이 서비스는 2010년 6월 18일에 중단되었다.[68] 톰킨스빌에 새로운 역 건물이 2010년 1월 20일에 개장되었으며, 톰킨스빌에서 하차하여 세인트 조지 페리 터미널까지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 승객을 막기 위해 개찰구가 설치되었다.[95]
2. 3. 지선 (폐선)
== 노스 쇼어 지선 ==노스 쇼어 지선은 1953년 3월 31일 자정에 여객 운송이 중단되었다.[5][47][144] 서쪽 끝의 작은 부분은 Howland Hook Marine Terminal의 익스프레스레일(ExpressRail) 복합 운송 네트워크의 일부로 화물 운송에 사용된다. 2007년에 개통된 이 네트워크는 아서 킬 수직 리프트 다리를 건너 케미컬 코스트에 연결된다.[159][145] 노스 쇼어 지선은 프록터 & 갬블(Procter & Gamble),[99]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집섬(United States Gypsum), 조선소, 그리고 세인트 조지 야드의 철도 페리에 서비스를 제공했다.[9]
리치몬드 카운티 뱅크 볼파크역(스태튼아일랜드 양키스(Staten Island Yankees)가 경기를 했던 곳)으로 가는 계절별 여객 서비스는 2001년 6월 24일부터 2010년 6월 18일까지 운영되었다.[147] 2008년에는 섬의 경전철 계획의 일환으로 대부분 버려진 노선을 복원하는 논의가 있었다.[148] 노스 쇼어 지선에 버스 급행 노선을 도입하기 위한 환경 영향 평가가 진행 중이다.[149]
== 사우스 비치 지선 ==
사우스 비치 지선은 1888년 1월 1일 아로차까지 개통되었으며,[19][20] 1893년에는 사우스 비치까지 연장되었다.[21][24] 이 지선은 1953년 3월 31일 자정에 폐쇄되었다.[47][144] 이후 버려지고 철거되었지만, 몇몇 구간은 남아있다. 클레이튼 스트리트와 세인트 존스 애비뉴의 콘크리트 제방,[151] 톰킨스 애비뉴 육교, 트레슬 다리인 아로차의 로빈 로드,[152] 맥클린 애비뉴 아래의 메워진 다리 등이 남아있다.[153][154]
이 노선은 메인 라인을 (클리프턴역 남쪽)에서 분기하여 메인 라인의 동쪽에 위치했다. 노선 부지는 재개발되었지만, 지도에서 대부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릴리 폰드 애비뉴는 스태튼 아일랜드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는 노선 부지 위에 건설되었다.[155]
로빈 로드 트레슬은 이 노선에 남아있는 유일한 트레슬이다. 2000년대 초반에 개발업자들이 트레슬 양쪽에 있는 토지를 매입했고, 이 개발업체, 뉴욕시 교통국(New York City Department of Transportation)과 뉴욕시 교통국(New York City Transit Authority) 모두 소유권을 주장했다. 트레슬 양쪽에는 타운하우스가 건설되었다.[155][156]
1860년에 SIR의 첫 번째 노선이 개통되었다. 초기에는 페리 환승역인 톰킨스빌에서 섬 남부의 종착역인 토텐빌까지였다. 당시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B&O)는 뉴욕 시내에서 여객과 화물 노선을 개발하려 했으며, 뉴저지와 연결되지 않은 이 작은 철도인 SIR을 인수했다. B&O는 톰킨스빌에서 북쪽으로 노선을 연장하여 섬 북동쪽 모퉁이에 세인트조지역을 신설하고, 맨해튼과 연결되는 페리 터미널, 차량 기지, 차량 이동용 부두를 설치했다.
== 트래비스 지선 ==
트래비스 지선은 알링턴 차량기지에서 프레시 킬스까지 뻗어 있으며, 섬의 서부 해안을 따라 운행한다. 이 지선은 1928년 아서 킬을 따라 걸프 오일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알링턴 차량기지에서 남쪽으로 습지를 지나 걸프포트까지 연결되었다.[33] 1957년에는 새로운 콘솔리데이티드 에디슨 발전소를 위해 트래비스까지 연장되었다.[6] 2005년, 이 지선은 개조되었고, 옛 콘 에디슨 발전소에서 스태튼아일랜드 환적소까지 프레시 킬스로 연장되었다. 환적소까지의 정기 운행은 2007년 4월에 시작되었다.[159]
== 마운트 로레토 스퍼 ==
마운트 로레토 스퍼는 마운트 로레토 어린이 보호소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폐선이다. 이 지선은 플레전트 플레인스 남쪽의 본선에서 분기되었다.[6] B&O 철도는 1950년까지 전철화되지 않은 이 지선에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이 지선에는 몇몇 산업 시설과 여객역이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철로가 제거되었지만, 1980년대까지 일부 침목이 보였다. 현재는 석탄 트레슬만이 이 지선에 남아 있다.[5]
== 웨스트 쇼어 선 ==
리치몬드 밸리역 남쪽에서는 비전철 지선이 토튼빌역 방향 선로에서 분기되었다. 1928년에 건설된 이 지선은 B&O 철도에 의해 웨스트 쇼어 선(West Shore Line)이라고 불렸으며, 아우터브리지 교 건설 현장에 건축 자재를 운송했다. 몇 년 후, 이 선로는 로셀리 형제가 소유한 고철 야적장을 운영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측선은 2011년 6월 14일에 운행이 중단되었다. 선로는 페이지 애비뉴(Page Avenue) 아래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으며, 여전히 레일이 놓여 있다. 이 노선의 부지인 나소 메탈(Nassau Metals) 소유의 재산에 대한 지역권은 나중에 CSX에서 사용했다. 오래된 선로의 일부 구간은 제거되었지만, 다른 구간은 덤불 속에 남아 있다.
3. 현재 운행
1924년 8월, 섬 내 3개의 여객 노선에서 전철화 공사가 시작되었다.
3. 1. 여객 서비스
스태튼아일랜드 철도는 원래 3개의 노선으로 구성되었지만, 현재 여객 운송 서비스는 남북 주 노선에서만 이루어진다. 이 노선은 1960년대부터 모든 도로와 입체 교차되었지만, 클리프턴 북쪽의 짧은 구간, 그라스미어역과 올드타운역 사이, 그리고 플레전트플레인스역 남쪽에서 노선 종착역인 토튼빌까지는 거의 지상으로 운행된다.[69] 세인트 조지의 종착역은 스태튼아일랜드 페리와 직접 연결된다.[69] 세인트 조지는 12개의 선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10개가 운행 중이다. 토튼빌역 동쪽에는 3개의 선로가 있는 조차장이 있으며, 역 자체에는 2개의 선로와 섬식 승강장이 있다.[70]
차량은 1973년 초에 제작된 개조된 R44 지하철 차량으로 구성되었으며,[52] 뉴욕시 교통국을 위해 R44 차량 주문의 마지막에 추가되었다. 이들은 세인트 루이스 차량 회사가 제작한 마지막 차량이었다.[71][72] 2024년 10월 8일부터 75대의 R211S 지하철 차량으로 교체되고 있다.[73][74][75][76] 이 노선에는 또한 브룩빌에서 제조한 4대의 BL20G 기관차가 있으며, 2009년에 인도되어 작업 서비스에 사용된다.[77] 중정비는 NYCT의 클리프턴 정비소에서 수행되며, 클리프턴에서 할 수 없는 작업은 차량을 베라자노-내로우스 다리를 통해 지하철의 코니 아일랜드 단지로 운송해야 한다. 통행권에는 고가, 제방 및 개착 구간과 세인트 조지 근처의 터널이 포함된다.[70]
스태튼아일랜드 철도는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 시대부터 사용해 온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 스타일의 색상 위치 신호를 사용한다. 2007년에 구형 신호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7200만달러 규모의 프로젝트가 완료되었다. 신호 시스템은 FRA를 준수하는 100 Hz 트랙 회로 기반의 자동 열차 제어 (ATC) 신호 시스템으로 개선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40대의 R44 지하철 차량과 4대의 기관차가 ATC 양방향 이동을 위한 온보드 객실 신호 장비로 개조되었다. 새로운 철도 제어 센터와 백업 제어 센터가 프로젝트의 일부로 건설되었다.[78] 이 노선은 뉴욕 시 교통국 표준 600V DC 제3레일 전원을 사용한다.[79] 열차는 여객 운송 서비스에서 최대 로 운행하며, 꼬리 선로, 측선 및 조차장에서는 로 제한된다.[80]
데미트리우스 크리클로우는 2024년 10월 임명 이후 철도 사장 겸 최고 책임자이다.[81][82] 약 200명의 시간제 직원으로 구성된 인력은 연합 운송 노동조합 지부 1440에 의해 대표된다.[83]
3. 2. 차량
1925년 ME-1 차량으로 운행을 시작하여, 1973년 2월 28일 R44 차량으로 교체되었다.[51] 1987년부터 R44 차량에 대한 개조가 시작되었다.[53]
3. 3. 접근성
던건 힐스, 세인트 조지, 그레이트 킬스, 뉴 도프, 토텐빌 역은 1990년 미국 장애인법을 준수하도록 개조되어 엘리베이터 및/또는 경사로를 갖추고 있다.[2][84] MTA의 2020–2024년 자본 계획에 따라 위그노와 클리프턴 두 역이 추가로 ADA 접근성을 갖추도록 개조될 예정이다.[85]
프린스 베이, 위그노, 애넌데일, 그레이트 킬스, 던건 힐스, 아서 킬 역에는 환승 주차장 시설이 있다.[86] 2017년 1월 21일에 개통된 스태튼아일랜드 철도의 가장 새로운 역인 아서 킬 역은 ADA를 준수한다. 이 역은 현재 철거된 애틀랜틱과 나소 역 사이에 위치하며, 이 두 역은 노선상의 모든 역 중에서 가장 열악한 상태였다.[142][87]
3. 4. 요금
현금 요금은 2.9달러로, MTA 버스 및 뉴욕 지하철과 동일하다. 요금은 세인트조지와 톰킨스빌에서만 승차 및 하차 시 지불한다. 세인트조지 또는 톰킨스빌에서 출발하거나 종착하지 않는 승차는 무료이다. 요금은 메트로카드 또는 OMNY로 지불할 수 있다. 카드를 사용하면 지하철 및 버스 시스템에서 연속 운행에 대해 무료 환승이 가능하므로, 두 번째 환승을 할 필요가 없는 많은 승객에게는 SIR 탑승 요금이 사실상 없다. 승객은 또한 사우스페리 근처에서 스태튼아일랜드 버스, SIR 및 맨해튼 버스 (또는 지하철) 간에 환승할 수 있다.[90] 이 때문에 SIR의 2001년 요금 회수율은 0.16이었다. 즉, 지출 1달러당 요금으로 16센트가 회수되었다 (MTA 기관 중 가장 낮은 비율).[91] 낮은 요금 회수율은 MTA가 2002년 10월에 SIR을 지하철과 병합하여 MTA 지하철을 형성하려 한 이유 중 일부이다. 이는 단일 노선의 회계 및 보조금 지급을 단순화하기 위함이었다.[92]
1997년, 메트로카드를 통해 SIR에서 지하철 시스템 및 MTA 버스로 무료 환승이 가능해지기 전에는,[93] 세인트조지를 제외한 정류장에서 탑승하는 승객에게는 차내 안내원이 요금을 징수했다.[94] 과거에는 승객들이 톰킨스빌에서 하차하여 세인트조지 페리 터미널까지 짧은 거리를 걸어가 요금 지불을 피했다. 그 결과 MTA는 톰킨스빌에 개찰구를 설치했고, 2010년 1월 20일에 새로운 역 건물을 개장했다.[95]
2017년 10월 23일, 메트로카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비접촉식 결제 시스템인 OMNY로 대체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OMNY는 큐빅에서 제작했으며, 애플페이, 구글페이, 근거리 무선 통신 기술이 탑재된 직불/신용 카드 또는 무선 주파수 식별 카드를 사용하여 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96][97] 개찰구가 있는 유일한 스태튼아일랜드 철도역인 세인트조지와 톰킨스빌역은 2019년 12월에 OMNY 리더를 설치했다.[98]
3. 5. 화물 서비스
1920년대에는 아우터브리지 크로싱 건설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스태튼아일랜드의 웨스트 쇼어를 따라 지선이 건설되었다.[6] 이 지선은 다리가 건설된 후 교차로 남쪽 지점으로 잘렸다. 걸프 오일(Gulf Oil)은 1928년 아서 킬을 따라 부두와 탱크 농장을 열었고, 이를 위해 트래비스 지선은 1930년대 초 알링턴 야드에서 섬의 서쪽 해안 늪지대로 걸프포트까지 건설되었다.[6][33]
화물과 제2차 세계 대전 교통은 SIRT의 누적된 부채를 일부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1940년대에 이 노선은 잠시 수익을 냈다. 전쟁 중 모든 동해안 군 병원 열차가 SIRT에 의해 처리되었고, 일부 열차는 부상병을 대규모 군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스태튼아일랜드의 알링턴 역에 정차했다. 전쟁 물자, 전쟁 포로 열차, 병력 수송의 필요성으로 인해 크랜퍼드 정션과 아서 킬 사이의 볼티모어 & 뉴욕 철도 구간은 매우 분주했다.[28] B&O는 또한 윈스턴 처칠과 같은 중요한 고위 관리들을 위한 특별 열차를 운행했다.[35]
SIRT는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와의 경쟁으로 인해 1953년 3월 31일 자정에 노스 쇼어 지선과 사우스 비치 지선에서 여객 서비스를 중단했다. 사우스 비치 지선은 그 직후 폐지되었고, 노스 쇼어 지선은 화물을 계속 운송했다.[47][144]
1956년, 아서 킬 스윙 브리지를 단선, 수직 리프트 브리지로 교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1959년 8월에 개통되었다.[9][49] 조립식 2,000톤 다리가 제자리에 떠올랐다.[6] 새 다리는 아서 킬의 항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연방 정부가 프로젝트 비용 11억달러의 90%를 부담했다. 화물 열차는 1959년 8월 25일 다리가 개통되면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27] 트래비스 지선은 1958년 트래비스(웨스트 쇼어)에 있는 새로운 컨솔리데이티드 에디슨 발전소로 연장되어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온 석탄 열차가 발전소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6]
토텐빌 노선의 운영은 1971년 7월 1일에 '''스태튼 아일랜드 래피드 트랜짓 운영국'''(주의 대도시 교통국의 한 부서)으로 넘어가고, 이 노선은 뉴욕시에 의해 구매되었다.[50] 이 계약의 일환으로 이 노선의 화물은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에 따라 B&O가 계속 처리하게 되었다.[6]
B&O는 체사피크 & 오하이오 철도(C&O)와의 합병으로 더 큰 체시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고, 섬의 화물 운영은 1971년에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 공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9] B&O와 C&O는 1976년 4월 1일 파산한 미국의 북동부 노선의 합병으로 콘레일이 설립되면서 뉴저지와 스태튼 아일랜드의 다른 재산과 격리되었다. 이제 화물 서비스는 필라델피아에서 종료되었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B&O 기관차와 하루에 B&O 화물 열차 1대가 크랜퍼드 정션까지 운행했다.[9][54] 1973년, 뉴저지 중부 철도(Jersey Central)의 차량 부유(car float) 야드가 폐쇄되었다.[55] 그러나 B&O의 차량 부유 운영은 1976년 9월에 종료된 후 나중에 세인트 조지 야드에서 스태튼 아일랜드로 다시 가져왔다. 이 차량 부유 운영은 1979년 9월에 뉴욕 도크 철도에 인수되어 이듬해에 종료되었다.[9]
스태튼 아일랜드의 몇몇 고립된 산업만이 철도 서비스를 계속 사용했고, 세인트 조지의 야드는 본질적으로 버려졌다.[6] 1985년 4월, 화물 교통량 감소로 인해 체시 시스템은 스태튼 아일랜드 철도를 뉴욕, 서스케하나 및 웨스턴 철도(NYS&W)에 매각했는데, NYS&W는 델라웨어 오츠고 공사(Delaware Otsego) (DO)의 자회사였다.[56] NYS&W는 이후 스태튼 아일랜드의 화물 운영을 유지했는데, 당시 10명의 고객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노선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를 희망했다.[56] 1989년, NYS&W는 엘름 공원 동쪽의 노스 쇼어 지선의 선로를 금수 조치하여 세인트 조지로의 모든 화물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 노선의 주요 고객인 프록터 & 갬블은 1990년에 폐쇄되어 화물 교통량이 더욱 감소했다. 1991년 7월 25일, 아서 킬 다리가 운행 중단되었고, 이 노선의 마지막 화물 열차는 1992년 4월 21일에 운행되었다.[57] 노스 쇼어 지선과 아서 킬 다리는 체시의 후계자인 CSX 교통(CSX)에 의해 인수되었다. 이 노선과 다리는 1994년에 뉴욕 시 경제 개발 공사(NYCEDC)에 다시 매각되었고, 그 후 10년 동안 잘못된 시작을 겪었다.[6]
뉴욕시 및 롱아일랜드 철도 화물 운송 및 린든 야드도 참조
2000년대 초, 뉴욕·뉴저지 항만청(PANYNJ)은 뉴저지주 스태튼아일랜드 래피드 교통 노선을 재개통할 계획을 발표했다. 뉴저지 중앙 철도가 뉴저지 교통 노선이 되면서, 이전 리하이 밸리 철도로 연결되는 새로운 분기점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모든 뉴잉글랜드와 남부 화물이 뉴욕 대도시권을 통과할 수 있도록, 브루클린에서 두 개의 철도 터널(하나는 스태튼아일랜드로, 다른 하나는 뉴저지주 그린빌로)을 건설할 계획이었다.[99]
2004년 12월 15일, 뉴욕시 경제개발공사(NYCEDC)와 PANYNJ는 스태튼아일랜드의 화물 서비스를 재개하고 아서 킬 수직 인상교를 수리하는 데 7200만달러를 투자하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아서 킬 다리 프로젝트에는 강철 상부 구조 재도색 및 인상 메커니즘 재활성화가 포함되었다.[100] 2006년, 아서 킬 다리를 포함하여 뉴저지에서 스태튼아일랜드 철도로 연결되는 화물 노선이 재개통되었다.[101] 정기 운행은 2007년 4월 2일(폐쇄된 지 16년 만에) 하울랜드 훅 해양 터미널 및 기타 산업체에서 컨테이너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시작되었다.[102] 해양 터미널의 서비스는 PANYNJ의 익스프레스레일 시스템의 일부이며, 단선 케미컬 코스트 연결선으로 완성되었다.[103][104] 서비스는 컨레일 셰어드 에셋 오퍼레이션스(CRCX)가 CSX 및 노퍽 서던 철도의 공동 소유주를 위해 제공한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노스 쇼어 지선의 일부가 재활성화되었고, 알링턴 야드가 확장되었으며, 트래비스 지선을 따라 프레시 킬스의 스태튼아일랜드 환승역까지 새로운 선로가 부설되었다.[105] 노선 서비스가 재개된 직후,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은 2007년 4월 17일에 재개통을 공식 기념했다.[159] 2019년 현재, 뉴욕시 위생국 계약업체는 퀸스와 맨해튼에서 하울랜드 훅 해양 터미널로 바지선을 통해 도시 고형 폐기물 컨테이너를 이동시켜 철도로 환적하고 있었다.[106]
트래비스 지선은 알링턴 차량기지에서 프레시 킬스까지 뻗어 있으며, 섬의 서부 해안을 따라 운행한다. 이 지선은 1928년 아서 킬을 따라 걸프 오일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알링턴 차량기지에서 남쪽으로 습지를 지나 걸프포트까지 연결되었다.[33] 1957년에는 새로운 콘솔리데이티드 에디슨 발전소를 위해 트래비스까지 연장되었다.[6] 2005년, 이 지선은 개조되었고, 옛 콘 에디슨 발전소에서 스태튼아일랜드 환적소까지 프레시 킬스로 연장되었다. 환적소까지의 정기 운행은 2007년 4월에 시작되었다.[159]
4. 역 목록
운행
완행
급행
급행
NYCT 버스: S40, S42, S44, S46, S48, S51, S52, S61, S62, S66, S74, S76, S78, S81, S84, S86, S90, S91, S92, S94, S96, S98[134]